우리것이 세계적이라는 생각
우리민족도 중국이나, 로마보다 더 훌륭하다는 몇가지의 예를 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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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학과 기하학의 응집으로 탄생된 석굴암
석굴암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될 정도로 유명한 우리 선조들의 슬기가 어린
작품이다.
태양이 떠오를때 서광이 석불의 얼굴에 비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여러 삼각형이 모여 그 꼭지점에 정확하게 건립되었으며 그 당시 척도로 사용한
당척으로 볼때 석불앞에 선 스님의 키를 정확하게 추정할수 있으며 지금은 서울대 교수팀으로 구성된 연구진들이 에어콘을 동원하여 석굴암내의
습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원과 삼각형구도로 시작하여 모든 설계가 수리학과 기하학으로 연구된 작품으로 분석되며 습기제거도 자연 스럽게
제거되는 시스템으로 건립되었으나, 일본측이 시멘트로 포장하는 바람에 엄청난 습기가 차게되어 지금은 대형 에어콘과 환풍기로 조절되고 있으며 석불은
대형 유리창으로 보호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선조들이 발견한 몇가지는 지금의 과학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찬공기가
아래로 흐르게 하기 위한 소금 섞인 땅과 돌로 만든 수로와 환풍을 할수 있는 공기흐름의 발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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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왜군은 감포로 오지않고 한양에서 먼 부산포로 오게 되었나?
한양의 지름길인 감포를 택하지 아니하고
부산포를 선택하여 침략하게 된것은 토함산에서 지키는 우리 관군에 관측되는 것을 우려하여 부산포를 선택한 것이다.
선조들은 한양의
지름길이 되는 감포에 관측대를 설치하였으니 왜군은 감포를 포기하고 험한 동래산성이 있는 부산포로 오게 되었다.
토함산에 위치한 석굴암의 석불이 정 동쪽인 일본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우리 관군의 관측소가 설치되었고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왜군은 부산포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 포항제철과 포항공대의 석학들도 만들지 못하는
에밀레종의 걸이에 관하여.....
엄청난 전설속의 에밀레종이 경주 박물관으로 옮긴후 수십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걸이가
없어 달지를 못하였다.
결국 합금술이 발달한 선조들의 문헌과 연구를 통한 고증으로 종의 원래 연결 고리를 찾아내어 달게
되었으나, 현대과학으로 그 연결 고리를 분석해보니 여러 가닥으로 연결된 과학의 덩어리라는 표현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다.
* 우리역사 바로보기
초등, 중등때의 선생님 일화및 설명등은 식민지사관으로 우리 입장이 아니고 일본의 입장으로 설명된 경우가 많은데, 패자의 역사는 올바르게
기술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멸망한 백제의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그러하고 신라의 경순왕 또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당나라 태종이 수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안시성을 공략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육로로만 공격을 했을까?
고구려에는 수군이 있었다면 왜 역사속에 기록되지 못했을까?
이런 역사 의식이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 될 것이며 이런 사관을
"추체험적 역사관"이라고 한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있다면 우리의 정서에 맞는 천리장성이 있으며 식민지를 겪으면서 알게 모르게 식민지사관이 우리들 속으로 파고들게되어 문제점
분석을 우리 시각이 아니라, 일본 입장에서 보게 되니 매우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