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명소 쇠소깍을 찾아서.....
제주의 가을은 기다림으로 시작된다. 수확기를 앞둔 농부에게는 한결 여유가 묻어 있다. 추석을 앞둔 고향집 식구들은 객지에 머물고 있는 자식이나 형제가 유난히 보고 싶어진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9월은 제주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다.
여름휴가는 끝났고 가을여행을 시작하기에는 아무래도 이르기 때문일까?
그래서 요즘 제주는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이 꺼지고 불잉걸이 되었다가 때를 기다리는 숯의 모습을 닮았다.
*푸른 물빛이 고운 쇠소깍 전경
-가을의 시작, 그 기다림의 의미
제주 가을의 첫자락에서 느끼는 분위기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쇠소깍이다.
서귀포시 효돈동 하효마을에 있는 쇠소깍은 효돈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있다.
도심지에서 10분 거리에 있지만 제주 섬주민들도 잘 모르는 숨겨진 명소이다.
오랜 세월을 베일에 가리고 속세와 거리를 두어 왔다.
낯선 곳이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 흥미를 붙인 여행자라면 길이 서툴러도 발걸음은 한결 가벼울
듯싶다.
* 쇠소깍이 시작되는 곳이 멀리 보인다.
-쇠소깍은 마을의 이름과 연관이 깊다.
서귀포시청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1999년)에 따르면 하효를 부르던 옛 이름은 쇠둔이며,
효돈천의 하구에 소(沼)가 있다고 하여 이를
'쇠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맨 마지막을 나타내는 제주말인 '깍'이 합쳐져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이름인 '쇠소깍'이 태어나게
되었다.
-쇠소깍은 제주에서도 가장 독특한 곳이다.
주변의 암벽지대는 갖가지 상록수와 소나무, 접암나무 등 다양한 식생들이 살아가는 울창한 생태숲이다.
숲속에는 물가로 내려갈 수 있도록 오솔길이 나 있다.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지난 여름 이 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은 이미 서서히 흙속에 스며드는 중이었다.
나무숲 사이로 옥빛 호수가 수줍게 고개를 여미는 게 보인다.
* 흐드러지게 생명을 발산하는 고사리 군락
- 용왕의 전설이 묻어있네
이 곳에서 돌을 던지거나 떠들면 용왕이
화를 내 폭풍우를 일으키고
그해 농사가 흉작이 된다는 전설이 흥미롭다.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곧바로 큰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그만큼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 화산활동의 흔적이 보이는 기암
- 쇠소깍은 용암이 흘러내려 굳은 암반 사이로 물길이 나 있고
산정호수처럼 생겼다.
폭은 10~30m 정도, 길이는 120m, 물 속 깊이는
4~5m로 규모가 크지는 않다.
양(量)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는 기대에 못미쳐 서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화시키는 능력만큼은 군계일학이다.
* 물과 나무와 기암은
하나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빛깔을 토해내는 산정호수는
자연 밖의 번뇌와 질투,
망상, 욕심을 모두 빨아들일 것만 같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기암절벽이 버티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 버렸다.
이 병풍바위들은 화산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용암들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지질자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활동의 흔적이 구석구석 묻어 있다.
지질학계에서도 제주에서 가장 오래전에 분출한 조면암이 분포하는 곳으로
쇠소깍을 주목하고 있다.
*테우타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자연입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며 다가오라고 손짓하는
쇠소깍은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는 성급한 여행자들에게는
기다림의 미학을 학습해 보라고 가르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묻어두고 싶은 미지의 세계, 그래서 쇠소깍은 류시화의 시를 많이 닮았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詩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