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사람들이 멋진 태몽으로 태어났다는 얘기들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은 화려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1957년 2월4일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350번지에서 태어났다.
자유당 시절 경찰 간부를 지내시던 아버지가 정권이 몰락하자 권고 사직으로 경찰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자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우리 집의 수입은 문방구를 시작한 어머니의 수입이 전부였다.
먹고 살기에 바쁜 시절에 조기 교육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부진아였던 나는 1963년 7살에 입학해야 하는데, 1964년 8살에 1년 늦게 초량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초등학교시절 열등생이었던 나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2학년 산수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던 것이 큰 사건이었음을 기억한다.
나도 “100점을 받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점차 초등학교 성적을 향상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철거민의 후예들
초량에서는 도시개발로 인하여 판자 집이 철거되고 있었는데 우리 집도 철거되어 연산동으로 집단 이주하였으며 이주지역에 따라 1공구, 2공구, 3공구로 나뉘어 졌는데, 철거민을 구분하던 공구 개념은 연산 1동, 연산 2동, 연산 3동으로 바뀌게 되었고, 철거민 이주의 공구 개념은 우리들의 뇌리 속에 항상 남아서 친구를 사귀어도 공구별로 하고 단합하는 의식도 공구끼리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사회에 지역구분이 생긴 이유중에도 하나일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에 전학 온 나는 4학년 때에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5, 6학년 때에는 회장을 역임 하면서 리더쉽을 발휘하는 모범생으로 완전히 탈바꿈 하였다.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던 시절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탓인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 앞에 서면 부끄러워하고, 발표력이 떨어지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소심한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중 2학년 때 소풍을 가서 노래를 시켰는데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이후 자존심도 상하고 하여 매일 재미있는 원고도 외우고 웅변 연습을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좌절감만 더해 갔다.
물론 가정에서의 대화는 전혀 안되었고 벙어리 냉가슴만 안고 있었는데 사춘기가 왔다.
인생의 고민도 생기게 되고 이성에게 관심도 쏠리게 되어 학업에 전념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나는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열심히 원맨쇼 연습을 자주 했고, 중학교 졸업식
날 학급에서 원맨쇼를 하여 우리 반 학생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먼훗날 내성적인 이 소년이 대학 축제때 사회도 보고, 대중들 앞에서 자신감 보이는 모습으로 여러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로 변화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곤장돔 추억 이야기 > 곤장 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곤장돔의 학교생활 (0) | 2007.03.01 |
---|---|
곤장돔 낚시 프로필 (0) | 2007.02.24 |
곤장돔의 사는 이야기 (0) | 2006.09.07 |
곤장돔 교직생활 (0) | 2005.02.25 |
곤장돔 학창시절 (0) | 2005.02.25 |